“릴리=코알라”라는 공식은 2020년부터 시작한다. 호주 여행에서 느릿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코알라의 매력에 빠진 작가가, 호주 대화재로 희생된 자연과 야생동물들을 애도하기 위해 코알라를 주인공으로 한 행복한 그림을 그리면서부터이다. ‘소확행 _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작품명처럼, 화면 속의 코알라들은 여행을 떠나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는 등 일상 속에서의 행복과 기쁨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로, 코알라는 작가의 히로인이자 페르소나로 자리잡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 유칼리투스와 당근꽃. 지금까지 코알라가 이끌었던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장식의 역할에 충실했던 이들에게 콕콕 점을 찍어 눈을 만들어줌으로써 생명이 부여됐다. 이 앙징맞은 두 눈은 식물 친구들이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계기를 만든다. 코알라들이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했다면, 유칼리투스와 당근꽃은 그들의 응집과 눈빛으로 이야기를 대신해 관객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갖고 깊은 사유의 여지와 상상력의 공간을 확장케한다.
새 연작은 기존 작업의 명확한 경계선과 심플한 컬러링을 넘어 촘촘히 쌓아 올린 색의 바탕과 다양한 붓의 움직임을 통해 Fine art로서의 회화성을 강조한다. 새로운 시도는 단순히 시각적인 요소를 넘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이야기에 깊이를 더하며 관객과의 심도있는 교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이러한 실험성이 아티스트로서 릴리의 발전 가능성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릴리는 숲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행복하고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가족의 어느 순간을 흥미롭게 연출한다. 물론 그것은 작가에 의해 연출된, 상상된 코알라 가족의 일상이다. 책을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장면이다. 코알라나 숲속의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대리한다. 의인화된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저 생명체들이 주체가 된 풍경이다. 작가는 귀엽고 팬시한 작은 생명체들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은유한다.
그림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려주거나 그림책에서 본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한 서사를 시각적으로 친절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단순한 기호와 도상으로 매만져놓고 평면적인 색채와 선명한 윤곽선 아래 조율하고 있다. 반복적인 채색과 선 긋기의 행위 아래 그림은 상당한 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며 그로인해 그림 그리는 일 자체가 자연스레 반복되는 일상이자 동시에 자신을 매번 그리는 행위 안으로 침잠시켜 몰두하게 하는 모종의 수행의 성격을 지니는 듯도 하다. 한정없이 시간을 소모하면서, 제공하면서 그리는 행위 안에서 시간을 망각하고 온갖 잡념을 지워나가는 일에 해당하기에 그럴 수 있다.
코알라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유칼리투스 잎사귀와 꽃, 당근꽃들도 사람의 얼굴을 하고 다가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여행길에서 접한 식물들을 소재로 해서 그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아름다움을 그림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 존재를 단순하게 집약해서 그려나간다.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과 식물의 세계는 다분히 범신론적인 세계관을 떠올려준다. 인간만이 인식하는 주체이거나 이 생태계에서 절대적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존재는 결코 아니다. 나와 대등한 생명체로서 타자를, 뭇생명체를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빽빽하게 일구어진 숲은 뾰족한 잎사귀와 줄기, 둥근 꽃들로 가득하고 가는 선과 촘촘한 점으로 채워져 있다. 실제 숲으로부터 영감을 받지만 작가에 의해 번안된 이 가상의 숲 공간은 작가에 의해 환상적이자 모종의 에너지로 가득한 몸을 이룬다. 그 숲은 깊고 깊은 내부와 표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온갖 생명체를 품고 길러내는 숲은 거대한 자궁이자 위대한 모성의 상징이 된다. 릴리는 그러한 숲의 에너지와 마력을 그림 안에서 가시화하고자 한다. 과밀도의 표면에서 번져 나는 눈부신 화려함이 모종의 힘을 거느리면서 피부 위에서 선회한다. 작가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영역이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본다. 작가가 지닌 에너지를 어떻게 화면 바깥으로 더 힘 있게 방사시키느냐 하는 형식의 문제, 그리고 보다 더 회화적이고 유연한 화면처리를 통해 그림을 보다 자연스럽게 만드느냐 하는 것 말이다.
작가는 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바탕 작업을 중시한다. 그것은 깊은 숲이 자리해야 하는 바닥이다. 동시에 무수한 시간과 삶의 경험이 누적된 공간,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온갖 감정의 희비가 교차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과 그 하루하루를 견디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폭과 깊이 등을 모두 아우르려는 시도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 모든 것을 시각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여러 겹의 밀도 높은 바닥칠과 그 위에 “오늘은 선물 같아요”라는 문자를 쓰고 그 위에 물감을 뿌려 결과적으로는 물감의 얼룩과 산개로 이루어진 바닥이 완성된다. 물감이 형태를 윤곽짓거나 사물을 지시하지 않고 그 자체로 물질성을 드러내면서 뿌려지거나 흘러내리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바닥은 복잡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재현하지 않고 자신의 물적 조건만을 드러내는 추상회화로서 자립한다. 그 복잡한 바탕은 작가의 작업 시간을, 그 동안 일어나는 여러 감정과 추억을 집어삼킨다.
그렇게 형성된 바탕 위에 작가는 공들여 유칼립투스 잎사귀와 꽃, 당근 꽃들을 빽빽하게 그려 나간다. 유칼립투스 꽃의 꽃말은 추억이고 당근 꽃의 꽃말은 희망이다. 추억과 희망으로 가득찬 정원이자 숲이고 일상이자 집이다. 바탕과는 달리 선명하고 단순한 색면과 반듯한 윤곽선으로 도형화되고 패턴화 되는 꽃과 바람개비가 그려지고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켜주는 둥글고 작은 점들도 박힌다. 화면의 중심 상부에는 코알라 가족이 주로 등장한다. 숲 속에 은거하고 있는 듯한 이 가족은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인간의 일상을 모방하고 대리한다. 그들은 잔잔한 웃음을 지우며 서로 모여 한 몸으로 이룬다. 책을 읽는 모습, 커다란 아이스크림이나 컵 케익을 들고 있는 모습 등이 바람개비 형태를 한 꽃들 사이에 묻혀 있다. 아마도 이 코알라 가족은 작가 가족의 모습이고 일상일 것이다. 작가는 “소소한 행복의 소중한 순간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작가가 관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음성이고 그림의 궁극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치유의 손길을 전해주고자 한다. 그림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좋은 그림은 항상 그런 역할을 해왔다. 전통시대에 그림이 지닌 주술성이 현대미술에 와서도 여전히 그와 유사한 기능을 도모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릴리는 그런 믿음을 정성껏 형상화한다. 이 매끈하고 산뜻한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진정한 변화는 미시적 차원에서 시작된다. 나의 작업은 단순히 시각적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깊은 사유의 층위를 담아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탐구의 결과물이다.
붓질 하나, 색채의 밀도, 그리고 재료가 가지는 물성까지 모든 요소는 내면적 서사를 구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이 서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세하게 변주하며, 관람자에게 미적 체험 이상의 경험을 제공한다. 나에게 있어 작은 디테일은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구조적 요소이며, 그러한 디테일이 쌓여 관객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예술적 감동이 극대화된다.
'소확행(Small Satisfaction)' 시리즈는 자연과 일상에서 포착된 찰나의 순간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만족을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상징적 요소인 유칼립투스는 코알라의 생태와 환경을 상징하는 동시에, "시간을 아름답게 덮는다"는 꽃말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는 작업의 주제적 틀 안에서 예술적 사유가 확장되는 지점이며, 관람자의 경험에 깊은 정서적 울림을 제공한다.
'Eucalypt' 시리즈는 유칼립투스 꽃을 매개로 하여, 시간의 흐름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작은 변화들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유칼리 꽃이 시간의 층을 덮어가는 과정은 작은 붓질로 전체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처럼 예술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커다란 단절보다는, 미세한 변화의 축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개인전 (총14회)
2024 Small Satisfaction (스페이스 엄, 서울)
2023 Begin again, again (갤러리다온, 서울)
2023 Notting Hill 노팅힐(갤러리 일호, 서울)
2022 Grand place 그랑플라스 (프린트베이커리 한남)
미술관/박물관
2023 프라움 지역작가 초대 개인전 (프라움악기박물관, 경기도)
2021 오늘은 월차 (한강뮤지엄, 남양주)
2023. 프라움 지역작가 초대 개인전(프라움악기박물관,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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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소장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백화점 킨텍스, 한강뮤지엄
Small Satisfaction 369_순간 속의 영원- 아름답게 덮인 시간 - 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