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mpled Blue Stripes #2110 - 서웅주

10,000,000원
작품명 : Crumpled Blue Stripes #2110,

130.5 x 80.4 cm
oil on canva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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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화면 전반을 아우르는 수직의 줄무늬는 구겨져서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구겨지기 이전의 본래모습인 일정한 성격의 규칙적인 줄무늬였음을 고찰 없이 추측할 수 있다.

작품은 평면의 캔버스 화면이 구겨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꾀함으로써 실재와 회화의 인식문제를 파고든다.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는 줄무늬의 수직선은 구겨진 화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동시에 중력에 의한 보편적 진리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확장한다.

유화물감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작품에서 회화적 환영은 결국 허상에 불과하지만 본질을 파악하는 단초는 언제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서웅주

 

개인전 (13회)

2024 실재 그리고 실제 개인전(논현 리나갤러리)

2024 꾸깃-꾸깃 개인전(송파 케이움갤러리)

2024 Squirning stripes 개인전(서초동 도잉아트)

그 외

 

단체전 및 아트페어 (80여회)

 

 

 

작업노트 

우리는 실생활에서 수많은 이미지를 접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단지 접하고 지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경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어떠한 형상이나 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모니터의 영상에서부터 거리의 간판이나 마주치는 사람의 얼굴 등 보이는 모든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모든 보아온 것은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나름이나, 그 이미지들은 연출된 것이라는 의심으로부터 본인의 작업은 시작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현실적 의미의 이데아를 찾아내고자 하는 시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지각(知覺)이 어둡고 사리 분별이 없던 어린 시절에는 보이는 것을 믿었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보이는 것조차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인 작품의 발전과정 역시 같은 수순(手順)을 겪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업에서 특히 주목하는 매체는 사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진의 의미는 사전적 의미의 사진 자체가 아니라 정지된 화면으로써의 포괄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진과 같은 정지된 이미지는 한 화면 안에서 모든 설명과 전후관계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촬영자의 의도나 감상자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개입되기도 합니다. 그 의도는 엄연한 연출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조작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재로 사진의 후보정과정은 필수과정으로써 인식되곤 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차원에서 사진이 보여 주기위한 매체라는 점에 대해 더욱더 천착(穿鑿)하게 되었습니다. 보는 이에 대한 배려가 담긴 사진은 어쩌면 진실과는 차이가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있는 사실을 기대로 담아내는 사진은 그 점을 이용해 보다 단단한 껍질과도 같은 페르소나(persona)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 껍질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하고,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보입니다. 그럴수록 사진을 통해서는 그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 알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면만을 보게 되거나 그 반대 면만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사진은 사실과 다른 조작된 복제물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본인 작품에서는 극 사실 회화로 제작됨으로써, 사진촬영에서의 무의식적인 개입과는 다른 작가본인의 직접적 개입이 벌어지는 회화를 통해 이미지에 접근하였습니다. 사진의 외적 차원에서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구겨지는 모양은 의도적일 수 없으나, 회화로 재현되는 과정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따라서 작품은 조작된 이미지의 허상을 그리는 것으로서, 직접적인 작가의 의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반증(反證)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보는 것은 아는 것이었으며 아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죽음보다도 큰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역시 현대인들에 있어서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단지 주요감각기관인 눈을 통해 빛을 감지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고 대상을 파악하며 존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한편,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인은 수많은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휴식을 위해 집에서 쉬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 세계를 보고 우주를 보며 꿈을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현대인의 눈은 더욱 넓어졌습니다. 또 이미 필수품이 되어버린 핸드폰과 디지털 카메라는 어떠합니까? 현대인은 자신이 속한 주변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보고 있으며 보여주기도 합니다. 수많은 볼거리 속에 살고 있으며 더 이상의 비밀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것을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매체 속에서 굳건해진 시뮬라크르(simulacre)는 보여주는 만큼 가려지며 알려주는 만큼 숨기고 있습니다.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살다보면 수많은 관계의 연속이며 그 관계 속에서 판단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판단은 모든 현실문제의 근원이 되므로 지극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판단의 문제에 보다 올바른 결정을 위해서는 적절한 정보수집이 필수가 됩니다. 그 정보수집에 있어서 시각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 합니다.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바라볼 때 항상 왜곡이 발생합니다. 개개인은 각자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소한 것들을 자신의 소망을 향한 징조(徵兆)로 해석하기도 하고 무의식적인 갈망(渴望)으로 방향을 잡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해석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더나가 그 사실이라는 것의 실체 또한 그림자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대중(다수)에 의한 문제 해석도 같은 이치를 갖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실체를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중매체에 의존하며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경제 또한 가상공간 속에서 좌지우지 되고 사회는 미디어 속에 존재합니다.

 

페르세우스의 방패

가공할만할 괴수 메두사는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돌로 변해버립니다. 메두사를 처치한 영웅 페르세우스는 묘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것은 바로 거울이었습니다. 직적 눈으로 볼 수 없는 메두사의 머리를 거울방패를 통해 비춰보고 머리를 잘라 자루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에게도 페르세우스의 거울이 필요했습니다. 그 것들은 맨눈 보았다간 혼란에 빠질 것만 같은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페르세우스의 거울을 찾아냈습니다. 그 거울은 사진이었으며 구김을 통해 독소를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보이는 세상은 상징과 기호의 집합체였으며 그것을 잘못 해석했다간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매우주의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광택이 넘치는 그림은 신중하게 대상을 해석 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습니다. 해답은 심사숙고할 시간이 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그 시간을 제공할 뿐 해석에 대한 정답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해답은 보는 사람의 몫인 것입니다. 작업노트 중에서,,,,

 

실질적으로 극사실 회화들은 대상을 사진에 담아 제작을 용이하게 합니다. 그러나 완성된 작품은 실제의 대상을 직접보고 그린체합니다. 극 사실 작품 외에도 대상을 사실적으로 담는 그림들 역시 유사합니다. 이들과 달리 내 그림은 사진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겨짐으로써 물질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캔버스가 담고 있는 화면에는 이미지(허상)만 남아있습니다. 현시대가 그러합니다.

 

작품은 대상을 구겨진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진실을 바라볼 수 없음을 우회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김의 행위를 통해 왜곡(아나모르포즈. anamorphose)된 대상은 극사실 기법을 통해 작업되어 지면서 작가인 본인 자신의 눈으로 관찰(패티쉬)되고 열망되어 집니다. 또 극사실적표현을 통해 또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미디어매체 속의 허상이미지가 아닌 손으로 그린 엄연히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작품이 세상을 이야기하는 독립적인 조각이길 원하며 그 자체가 작은 세상이길 바립니다. 이 바람 속에 숨은 메시지는 대상의 진실을 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품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상황이나 경험에 의한 소재를 결정하고, 적당한 보정작업과 함께 구김으로써 메시지를 부여합니다. 그 다음으로 캔버스 위에 유채로 충실히 재현(representation)함으로써 제작됩니다. 여기서 선정된 소재는 다양하고 한계가 없습니다. 심지어 실재 존재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추상적 도형에서 문자, 심벌(symbol), 기호, 상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삼습니다. 사진이미지 뿐만 아니라 모든 이미지는 사진의 촬영자와 같은 의도적 개입으로 인해 조작이 이루어집니다. 문자를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글자체를 활용하여, 작가가 의도하는 목적과 그 상황에 준하여 분위기를 맞추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화면 위에서 소재가 된 대상과 구겨진 표면 간의 이중적 공간이 형성되며, 소재 자체가 갖는 공간감과 구겨진 구김살간의 굴곡을 입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중 공간 간의 이질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독립된 두 공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보입니다. 그로써 대상을 임의로 분해하고 다시 결합시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성자의 의도가 담겨진 소재는 재결합되는 회화 언어를 통해 불편한 대상으로 재탄생됩니다. 이로써 수없이 많은 조작된 이미지로 현혹(眩惑)되는 현대인의 이미지 생활을 비판적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본인이 사용하는 극 사실 기법의 경우, 작가의 의도가 작은 부분에서부터 화면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기계적으로 복제된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의 손을 통해 한땀 한땀 그려진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 보여 지는 모습은 비슷하나 생성원리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Crumpled Blue Stripes #2110 - 서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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