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마태 초대전 <커튼콜>을 열며
엄윤선 스페이스엄 대표
좋은 작업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이 되는 많은 조건 중 독창성과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너무 어려워서 모방이 불가능하던가 혹은 손이 많이 가고 고생스러워서 이런 걸 왜 따라하는지 지레 포기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권마태 작가가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매우 좋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화면의 바탕에 일렁이는 듯 역동적인 스트로크가 주를 이룬다. 불꽃같기도 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하는 이 필체는 2020년 스페이스 엄에서의 초대전에서 처음 선보였다. ‘성령의 불꽃’을 모티브로 하며 근래 모든 작품의 배경과 주인공인 대상에서도 사용됐다. 특히 최근 몇 년 간 주력했던 ‘너는 빛’ 시리즈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이 스트로크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냄은 물론 권마태 작가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 시그니처가 됐다.
‘분위기’가 언급됐으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권마태의 작품은 모든 화면을 검정색으로 덮은 후 색을 올린다. 이 딥 블랙은 작품이 묘사한 시간이 밤인 듯하다가 개기일식 아래의 낮과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심연의 바다나 미지의 우주 같은, 시간과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초현실적 분위기가 전적으로 이 검정에서 나온다.
이는 더러 그로테스크하고 혼돈스러운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작가의 외동딸로 짐작되는 어린 소녀의 형상을 묘사하는데 검정색을 사용한 걸 보고 혹시 오컬트적이거나 다크사이드인 것은 아닐까 잠시 의심해봤다. (작가가 크리스찬임이 공공연한데도 말이다!) 왜 검정을 썼을까. 필자의 답은 “필름의 네가티브” 이다. 작가는 기억이 찰나를 지나면 왜곡되고 변형될 수 있다고 했다. 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현실과 과거 기억의 차이를 필름에 대유해, 필름 화면의 어둠과 밝음이 뒤바뀌어 있듯이 가장 밝고 환한 존재를 네가티브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고 다시 작품을 돌아보니 그의 작품 하나하나엔 밝음과 환함이 가득하다.
3년만에 열린 초대전 <커튼콜> 에서 작가는 코끼리와 동물, 소녀같은 단일 캐릭터와 더불어 풍경으로 주제를 확장했다. 최근 작가의 행보가 아트 페어와 단체전에서 코끼리 연작이 주를 이뤘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전시는 구성면에서도 다채롭고 풍성하다.
작가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이번 작품들이 과거의 여러 연작에서 이어짐을 발견할 것이다. 권마태 작가는 이번 전시를 두고 ‘과거의 자신을 불러 커튼콜을 하는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커튼콜이 오늘 무대의 대단원으로써 공연 전체의 평가를 여실히 들어내는 만큼, 열렬한 커튼콜은 다음 무대를 새로 준비하는 촉매제가 된다. 그러니 이번 전시가 뜨거운 커튼콜을 받아야겠지. 그가 일궈낸 고유한 ‘권마태의 작품세계’가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하니 말이다.
[커튼콜] 작가노트_ 권마태
작업에 임하는 호흡이 심히 짧았던 시절이 있었다. 대략 10년 전부터 5년 전 까지가 그 기간인데, 하나의 주제 혹은 방법론이 채 일 년이 안 되어 전면적으로 바뀌고는 했다.
무언가를 파고 또 파서 심화시키는 과정을 몹시 지루해하는 성격이 가장 큰 이유였고, 다양한 변칙과 스타일을 거리낌 없이 시도하여 수많은 후대의 추종자들을 거느린 호안 미로처럼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라는 창작 유희의 자세였음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하면 누군가 보아줄까' 하는 소심한 조급증이 절대 아니라고 자신하지도 못하겠더라.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현재의 나로부터 매도되기에는 가여운 수많은 과거의 나들(each me)이 쌓아올린 제법 그럴듯한 생각의 고리들이 있었고, 그 연결점 하나하나가 지금의 작업 방향을 찾아가는 실마리가 되었으니, 나같이 진득하지 못한 이에게도 (멀리 돌고 돌망정) 나름의 때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보다.
세상의 모든 작은 한걸음을 응원하고자 올 봄부터 '커튼콜' 이라는 주제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어렵게 한 발 내딛는 작은 용기가 불러올 거대한 에너지를 기대하며 붓을 든다. 덧붙여 생각의 무게에 눌려 끙끙거리던 과거의 나들에게 그 시절이 무의미한 시간들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려 한다. 화가는 그림으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이런저런 이유로 심화되고 연작화 되지 못한 채 누군가의 거실 벽에 걸리거나 낡은 드로잉 바인더에 끼워져 잊혀진 권마태의 생각들을 오마쥬하여 현재의 권마태가 추구하는 방법론과 감수성으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를 이번 전시에 포함하였다. 조심스럽게 전업화가의 길에 들어섰던 과거의 나를 커튼콜하는 마음으로.
삶의 구조와 의미가 투영된 방법을 찾기 위해 긴 시간 고민과 헛발질을 거듭한 끝에 지금의 작업 프로세스를 장착하게 되었다. 프로세스의 중점은 이전의 행위가 다음 행위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며 나중행위에 따라 과거의 행위가 변질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나는 이 방법론을 '시공간의 규칙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붓질stroke과 채색coloring의 복합적 레이어multiple layer'라고 부른다.
형상을 벗어나려 애쓰지 않지만 형상을 더 멋지게 구현하려는 목적은 더더욱 아니기에 붓질과 색은 때로 장면scene을 관통하고 때로는 장면에 종속되어서,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규칙으로 규정되지 않음을 대변하려 한다.
물론 삶에 정답은 없고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시시각각 변해버리기에, 작업을 대하는 지금의 내 태도는 정답이 아니며 정답이어서도 안 된다.
나는 불완전과 불안정의 틈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그저 걸을 뿐인 여행자로서 구상과 추상의 상호간섭에서 균형을 찾아내어, 자유와 통제의 경계에 발을 딛고 서서, 동경과 한계를 자각하는 한 번의 붓을 긋고자 한다.
<시간 위에서>
기억이란 본디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왜곡되고 변질되기 마련이라 지난 일 중에 작은 것 하나 규정짓기도 어려운 법이다. 이렇다보니 미래를 예측하기는 커녕 두려움을 떨쳐내기만도 버거운 것이 삶인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인생을 걸고 도달하고자 하는 그 곳이 물질세계의 직위나 직함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와 순간순간 대립하게 될 테지만 그런 갈등도 내 일부이니 어쩌겠나.
낯선 시간 위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내가 쉬어갈 곳은 어디일까?
<커튼콜>
커튼을 사이에 둔 양쪽의 세상을 같은 나의 삶이라고 실감하기가 어렵다.
지금은 덤덤히 이야기할 생각의 무게가 당시에는 쳐다보기만도 버거웠으니 막을 들추어 밖을 내다보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모험이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발뒤꿈치를 물지 않도록 나를 가볍게 유지하려고 한다. 나는 다음 막을 걷을 용기를 내야하고 필요한 건 햇빛과 약간의 운이니까.
이제 너를 부르는 박수를 치려고 한다.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권마태 프로필
개인전 (9회)
2023 [ 커튼콜 ] / 스페이스엄
2020 [ 다시, 십자가 ] / 스페이스엄
2018 [ 깊은 숲 ] / 뮤제드파팡
단체전 (30여회)
2023 [ 완전한 선물 ] / 스페이스엄
2023 [ 엄선전 ] / 스페이스엄
2023 [ 존재의 자리 ] / 에코락갤러리
2023 [ 교토삼굴 ] / 에코락갤러리
아트페어 및 옥션 40여회
나의 마지막 교회 3 - 권마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