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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물며 떠나는 일, 그 시간을 지나온 풍경 |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산다는 것, 그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1)어른도 한때는 어린이였다. (어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2)1)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김호영(역), ㈜문학동네, 2025, p. 17.2)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김미정(역), ㈜미르북컴퍼니, 2026, p. 7. 허현숙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붙잡게 되는 것은 기억과 향수(nostalgia), 흘러가는 삶-시간에 관한 무언가이다. 빛나는 생기에 슬픔과 허무가 스며든 아스라한 분위기의 그림은 집들로 가득 차 있다. 식었지만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은 차를 마시는 듯하다. 작가는 실재하는-실재했던 집과 마을과 도시의 풍경을 관찰하고 수집해 차곡차곡 기록해 왔고, “내가 살던 집”,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뿐 아니라 한때 내가, 또는 누군가 “살았던 도시”들은 흑연(연필)로 그려져 기록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그리기-쓰기 도구인 연필은 본 것과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남기기에 효과적인 재료였다. “내 비밀을 말해줄게.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봐야 보인단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3)3)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2026, p. 111. 작가는 실재하는 풍경에 근거하지만, 집과 동네를 똑같이 옮기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사라지는 공간 속 사람들의 삶과 기억까지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기에, 정취로 채우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어려서부터 봐왔다. 집이 세워지고, 누군가 들어와 살다가 집이 사라지면 사람들도 떠난다. 먼저 떠난 사람의 흔적이 흩어지다 사라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애틋한 만큼 서글프다. 작가는 필요 이상으로 서정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집과 공간에 관한 이론서들을 챙겨보고,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포트폴리오에 적힌 작가 노트 사이사이에 발췌되어 자리한 글귀들은 작가의 그림이 개인의 서사에서 보편의 역사,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종합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공간인 동시에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대상인 집은 매우 사적이고 내밀하지만, 공적이기도 하다. 지독하게 세속적이면서도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영역에 닿아 있다. 이런 이유로 집을 그리는 작가의 행위에는 실재하는 삶의 이야기뿐 아니라 내가 바라고 남들도 인정하는 행복한 삶을 붙잡으려는 마음이 담긴다. <도시계획(都市計劃)>(2011-2018), <어디서든 행복하길 바랄게요>(2018), <우리가 있었다>(2024), <세상에서 제일>(2025-2026) 시리즈들에서처럼 화면 가득한 집들은 한정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직관적으로 전한다. 집은 바람과 기대가 축적된 곳이자 시간의 지층과 같다. 물론 재개발을 이유로 흔적만 남은 자리, 비어버린 마음의 공간을 채우기 위한 시도라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은 집을 갖고 싶어 하고, 소중한 존재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소멸하는 것을 붙잡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치 잃어버린-잃어버릴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것만 같다. 사라진-사라질 존재를 붙잡고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림에 새겨나간다. 이런 허현숙의 작품에서 『어린 왕자(Le Petit Prince)』(1943)의 소행성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곱씹어본다. <慶祝(경축)>(2018)에서부터 <숲세권>(2021)과 <꿈동산>(2023) 시리즈들, 특히 <세상에서 제일>(2025)처럼 다수의 작품에서 동그란 형태로 층층이 쌓아 올라간 형상들이 발견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노르스름한 장지에 연필로 그어진 선들이 머금은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집과 동네를 그려내는 작가가 고정된 가치관에 사로잡히기 전인 아이-어른의 눈과 마음을 가져서인 것만 같다. 아이-어른의 시선이 그저 천진난만하고 맑은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가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획일화된 가치들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과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내적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뒤처지지 않는 안정적 삶의 증거와 같은 집에 “애착이자, 애증”을 갖는 “전투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완전히 길들지 않은 작가는 그 안에 머물지만 거리를 유지하며 관찰하고, 경험과 꿈을 담아 집을 그린다. 작가가 집의 내부를 그리지 않고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이러한 태도와 연결된다. 그리지 않음으로써 집을 향한 복잡다단한 감정이 고스란히 보관된다. 어린 시절의 집은 가족처럼 주어진 세계에 가깝다. 집은 제일 처음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관계를 맺는 장소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사회인”이 되면 집은 욕망하고 소유해야 하는 현실적인 대상이 된다. 성장한다는 것은 처음의 세계를 떠난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허현숙이 그린 집은 과거를 향한 애착과 상실이 교차하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고독과 유사성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타자의 현존이 없는 타자의 공간이자 스펙터클로 구성된 공간인 비장소”가 늘어나는 오늘날, 허현숙의 특별한 장소는 나와 사람들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지나온 역사를 일깨운다. 그것은 정착하고, 전유하고, 교류하는 사람들의 시간이다.4)4) 이상길, 「옮긴이 해제: 따로 또 같이, 비장소에서 살아가기」, 마르크 오제, 『비장소-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이상길, 이윤영(역), 아카넷, 2024, pp. 175-176. “집이 지어지고 부서지는 게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지는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 집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싶었다.”5)5) 이문정과 허현숙, 작가 인터뷰, 2026년 8월 19일. 허현숙의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사라질 존재들, 시간들, 장소들, 그리고 그 공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까지도 주인공이다. 그래서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모양과 구조의 집이라도 누가 머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집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을 닮아간다. 작가가 자신이 선택한 풍경을 재구성이라고 말할 정도로 변형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찬란하게 그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예쁘게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서든 행복하길” 바라는 만큼 힘듦과 부침도 있지만 그것이 부정적으로만 다가오지 않아 어두움으로 쏠리지 않았다. 어쩌면 과거와 미래를 함유한 현재를 그릴 뿐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6) 작가가 마주하고 기록하는 것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 머물렀던 장소와 기억, 존재의 생애이기에 작가의 시선은 과거에만 머물 수 없다. 결국 집은 삶이 지나가는 장소이고, 한 사람이 세계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보석함이다. 그리고 기억 속 동네는 현재의 마음속에 보관된다.6) 이문정과 허현숙, 앞의 인터뷰. “우리 삶의 공간은 연속적이지도, 무한하지도, 동질적이지도, 등방(等方)적이지도 않다.” 그렇기에 삶의 “균열들, 간격들, 마찰점들을 어렴풋이 지각하며” 공간이 어딘가에 고정되거나, 부딪치거나 부서짐을 막연히 느낄 뿐이다.7) 어떤 장소에 살았던 사람이 떠나는 일, 나만의 소행성이 잊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기억은 연해진다. 소멸-이별은 한순간 일어나지 않고 존재, 장소, 기억이 차례로 희미해지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 사람이 사라지고, 집이 사라지고. 기억마저 흐려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그 모든 흔적을 상상한다. 집을 그리는 일은 상실에 대한 위로이고, 한때 존재했던 것들을 조금 더 머물게 하는 행위이다. 언젠가 떠나갈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지워질 자신을 남기며 떠나가는 손짓이다.7) 조르주 페렉, 2025,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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