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 초대전세계별세계Worldotherworld전시후평론 레토릭: 이미지의 태생적 풍요로움(에 관하여) 로버트 S. 넬슨Robert S. Nelson 등이 엔솔로지 형식으로 엮은 <Critical Terms for Art History>에서 ‘미Beauty’ 챕터를 담당한 이반 개스켈Ivan Gaskell은 자신과 같은 학자들이 ‘아름답다’와 같은 가치평가적 용어들을 회피하는 두 가지 이유로 표준성normativity과 주관성subjectivity에 대한 우려를 꼽은 바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말과 글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 생활을 하고, 거기에는 다시 모국어와 외국어라는 일반적인 기준이 있어서, 마음의 정향이나 사실적 정보를 바탕으로 설명과 설득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휘와 활용에 대해 풍부하고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와 같은 추상적 가치들은 다시 범세계적 통용과 국가간, 집단간, 개인간 문화 및 인식의 공시적 차이로 인해, 그리고 역사적 흐름이라는 통시적 차이로 인해 계속 그 간극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변화하기 때문에 ‘정확함’이라는 말부터 다시 그 실체성을 위협 또는 의심받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의 언어적 이해의 일치는 불가능하다는 외롭고 간명한 진리에 도달한다. 그리고 만약 그 언어의 범주를 예술, 그러니까 활자와 구두 언어를 포함하든 그 밖에서 찾든 몸짓, 음악적 요소들, 그리고 각종 평면과 입체 형태의 시각 매체 등으로도 확장한다면, 그 이해 격차와 공백은 더 벌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언어들을 본능적이든 사회적 합의로든 인정하는 이유는 상형문자로 대표하는 고대에서의 예처럼 그것이 추동하는 언어적 발전과, 당대에 현존하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문화적 간극을 오히려 메워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라는 정치적 기본 합의로도 보호되어 왔으며, 계속 언급하고 있는 ‘미’에 대해서도 흑-백에 대한 본능적 호불호 문제와 같이 인종주의적 논란의 여지를 끌어안고도 인간의 직관성과 보편성 등에 대한 호기심과 그에 대한 연구들, 그리고 ‘추’의 불완전한 대립성, 즉 상대성과 상호보완성 등 유의미한 학문적 성취가 쌓여왔다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모든 예술가들이 천착하는 주제와 영역은 나름 구체적이고 대개 회화의 언어적 성격 자체를 목표하지는 않지만 그 흥미와 의미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자체’를 좀 더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는 정직성과 같은 희소한 작가에 대해 논하는 데 대한 특별함은 그야말로 ‘특별’하다 할 것이다. 즉 정직성이 발현하는 회화적 미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어 더 마음이 가벼워진다. 마치 ‘정직성’이라는 예명 역시 그 ‘적절성’을 용인하기 위해 애당초 지어진 것 아닌가 하는 기대 섞인 추론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효용성’, ‘성실성’처럼 무언가 가치의 성격 혹은 신봉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로 여기게 되는 일반명사적 용어 느낌이 있는데, 정작 국어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은 고유명사. 최근의 작가노트에서도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 단어의 격차에 따른 틈새를 음미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밝혀두었듯 작가는 자신의 예명에서부터 한국어 단어 안에도 문화적 차이, 즉 비집고 들어갈 빈 자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시에 ‘정직성’이라는 가명 자체가 정직하지 않다는 말, 그리고 세상에 완벽히 정직한 사람이 없음을 상기한다는 점에서 이중적 아이러니 혹은 중의적 의미가 확보된다. 더욱이 작가는 종종 노골적으로 ‘중층성’에 대해 말하거나, 말하고자 한다. 이는 세상을 가급적 입체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특히 그것이 어떤 층layer 구조로 인해 저층부에 깔려 있어 보이지 않거나 희미하게 보이는, 그리고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의지를 내보인다. 이에 대해 어떤 계층적hierarchical 사회 구조를 거의 직접적으로 차용하기도 하나, 다양한 시도 속에서 강약을 조절하거나 중층성 자체에 대한 탐구가 더 풍부해지도록 노력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다만 그 ‘노력’조차도 상업성 있는 시각예술 작가가 되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여러 종류의 분투 속에서 얻게 되는 고민과 환희가 뒤범벅된 상황에서 나온 ‘발현’에 가까워서 하나의 연작이 시작되기까지 무르익어야 하는 시간은 대개 3년에서 5년이라고 하니 그의 과감한 스트로크들도 의외로 충동적이거나 전격적인 과정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밝혀둔다. 그 신중함은 작가의 미술박사 학위논문 국문초록에서도 엿보이는데, “본인은 작가로서 본인이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사회적 상황들과 그 조건들로 인해 형성되는 개인적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회화 형식에 있어서 재현의 범주로 한정 짓지 않고 유연하고 압축적으로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 방식을 추상을 비롯한 회화사의 여러 형식들을 참조해 찾고자 시도해왔다.”라는 기술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지는 해당 논문 111페이지에서 다시 “재현이 대상을 원인으로 환원시킨다면, 표현은 그들의 포함관계, 즉 표현의 양식이 전면에 부각된다.”는 설명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정리, 주장되고 있기도 하다. 정직성은 나아가 “구상과 추상의 영역이 토대와 상부구조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성을 갖고 붙어서 진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운동성’과 ‘본인이 지각하는 현실’의 상관관계가 작가의 중층성에 대한 동력이며 존재의 이유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재현을 넘어 표현을 하고자 하는 한 개인으로서 누리게 되는 방법론이자 도전 과제를 지칭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득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주로 쓰는 용어 ‘레토릭Rhetoric’을 차용하고자 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나 키케로Cicero의 수사학 또는 능변술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에서도 저널리즘의 부적절하거나 필요 이상의 현학적이거나 미사여구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는 이 말은 학문과 기술 사이 어디쯤에 계류하고 있는 문제적 개념이기도 해서, 특정 작가의 세계를 ‘레토릭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도전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정직성은 스스로 그 시도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고 또한 그것을 행하고 있다. 즉, 자신의 회화가 어떤 직접성과 간접성이 있는지, 어떤 현실성과 비현실성이 있는지, 또 어떤 평면성과 입체성이 있는지 궁금해하고 논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연립주택’ 시리즈로 주목받은 2006년부터 줄곧 이어져 왔으며, 현대자개회화를 10년 이상 연구하는 등 사뭇 다른 장르에 도전, 병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채로운 활동 속에서도 사실 크게는 그러한 추상적 목표 아래 구체적인 변주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스페이스엄 초대전 《세계별세계》에 전시된 작품 몇 점을 톺아보자. 2021년과 2022년에 각각 그려낸 ‘새벽매화’ 연작의 모티브가 된 촛불은 한국 현실정치에서 그것이 갖는 특수한 위치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은유를 넘어서는 비유를 통해 그 강력함을 확보한다. 즉, 밤을 넘기며 피어낸 절절한 우아함, 그러나 아직은 ‘쌀쌀한 공기’,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보인다’는 갤러리 측의 해석까지 가미해보자면, 이는 특정 사물에 관계가 있는 다른 사물을 빌어 나타내거나, 기호로써 나타내는 것을 대신하는 환유換喩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장미Roses 202314’는 장미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 속성을 힘 있는 스트로크와 중첩적 색채의 절제된 표현으로 운동시키며 양적 크롭crop이 아닌 질적 추출extraction함으로써 어떤 전체를 부분으로 설명, 즉 제유提喩하기도 한다. ‘빗속의 버드나무 Willow In The Rain 202332 / 33/ 34’는 또 어떠한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먼저 소회하자면, 어렸을 때 비 오는 양평 두물머리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지나며, 한동안 한껏 젖은 버드나무들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필자는 처음에는 두려움이, 그 다음에는 생과 사의 경계를 보는 듯한 아득함이, 그리고 드디어 그 곳을 지나 더 이상 나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아련함을 경험했는데, 이번 전시 아래층 코너에서 이 작업을 보자마자 그때의 단상으로 빨려들어가기도 했다. 그것은 트라우마와도 같은 고통과 슬픔이기도 했다. 행복했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것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개인적인, 또 다른 맥락의 어떤 경험을 아프지만 담담하게 그려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지엽적으로는 어떤 심상을 은유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은유에 가둬지지 않는다. 그렇게 명시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이 작업이 가지고 있는 추상성은 한편으로 어떤 보편적 매커니즘이 있다. 내용이 서로 다르지만, 크게 보면 ‘향수’와 같이 각자의 마음을 어떤 기억으로 불러들이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충돌이 있다. ‘비’가 가진 대유법적 장치성은 크지만, 반대로 ‘버드나무’는 나무를 대표하는 보편적 특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점은 우리 개인, 그리고 그 각각의 인생이 갖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겸비한 매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품이 갖는 위치는 매우 중층적인 운동성이 있다. 또한 작가가 의도한 강렬한 채도의 겹은, 현실을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의 ‘쌓여나감’, 또는 퇴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높은 채도의 합은 역시 높은 채도인 동시에, 무게감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게 한다. 그러면서도 오랜 생각의 준비 끝에 시간의 효율성을 위해 빠르고 간결한 붓놀림을 택했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즉흥성으로만 읽힌다는 점에서 정직성의 회화가 가진 묘미는 드라마틱하기도 하다. 그리고 다수의 관객은 거기에 들어간 테크닉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며, 어떤 의도나 장치 이전에 ‘미 그 자체로서의 미’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런 현장에서의 감상은 ‘능소화’, ‘상서로운 꿈’과 같이 직접적이면서도 무언가 내러티브를 적당히 숨기고 있는 듯한 제목의 연작들에도 작동한다. 이러한 개별적 작품들간의 연결성은 정직성이라는 세계를 또 다른 세계로 구축하며 감상 대중에게 좀 더 편안한 레토릭으로 손을 내민다. 분석할 수 있되, 분석할 필요 없는 시각예술의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가령 ‘수국’과 ‘불탄 후 다시’가 각각 갖는 경험의 규모, 타자성은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속성을 생각했을 때는 같은 이야기가 되고, 결국은 시각적 취향에 따라 작품의 여러 요소가 새삼 강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시時를 대할 때 일어나는 레토릭 작용과도 유사한데, 그 원인에 대해 르네 위그René Huyghe는 대표 저서인 <Dialogue avec le Visible>을 통해 시와 미술이 가진 ‘이미지image’로서의 공통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영혼 속으로 내려가 그 은밀한 풍요로움을 끌어내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하는 것이며, 미술의 기능, 목적, 정의라고 확언할 수 없는 그 이상의 훨씬 더 복잡하고 광활한 현상”이라는 다소 현학적인 설명으로 부연되기도 했는데, 조금 쉽게 풀어보자면, 그 ‘묘한’ 작용을 ‘순수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책을 한국어판으로 옮긴이(곽광수)의 말에 따르면, “시는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즉 주관적인 감성적 내면에서 벗어나 있는 언어로써 시를 표현하려는, 그러니까 원칙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기도인 반면, 미술은 미술가에게 감동을 느끼게 한 대상을, 즉 그 감동을 담고 있는 그 대상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므로 언어예술로서의 시 작품보다 유리하다.” 그러면서 “화가는 모방, 구성, 표현이라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현실, 아름다움, 시라는 삼위일체를 예배한다.”고 이 책의 정수를 요약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정직성의 회화는 마치 작시법과 같은 조형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그 힘이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는 시간의 무게를 만들었으며, 표준성과 주관성의 우려까지 불식시키며 순수미술의 대표격으로 추상미술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직성의 레토릭은 어느 전략적이고 기술적인 현실 정치 언어에서 주로 발견되는 기술 이상의 삶 자체에 대한 ‘당면하는 존재’를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을 작가 노트의 언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어휘가 있다면 ‘가혹함’일텐데, 이것은 신이든 인간이든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환경의 거친 속성에서부터 자연이나 인생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불가항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harshness’나 ‘cruelty’와 같은 번역으로는 충족이 되지 않는 추상성과 불안성을 함께 안고 있다. 즉, 정직성의 중층성을 드러내는 회화의 주제와 기법이 역설적으로 ‘미 그 자체로서의 미’를 환기하듯이 ‘가혹함’이라는 가치에 대해서도 어떤 반전적 내러티브나 교훈을 꼭 찾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인생의 속성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게 하는 일종의 무덤덤함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층성은 주관이 모여 객관을 이루는 물리적 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굳이 화학작용을 구분해 찾거나 기대하지 않더라도, 그 층의 결합은 이미 정신적 교감과 화학을 이루었고, 결과적으로는 입체적이고 조형적인 무엇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화의 기본적 소임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가 자신의 논문에서 표방하는 것으로 소개한 ‘메타모더니즘’,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사이에서 모더니즘의 비현실적 이상주의를 경계하며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망을 견제함으로써, 그 사이를 진동하면서 사유되는 문화적 감수성”을 모든 감상자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정직성’이라는 이름의 이중성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만의 중층성을 이미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번 전시가 작가에게 커다란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예고한 데 대한 응원을 표함과 동시에 그것이 의미 있는 정리의 성격이 되더라도 한편으로는 큰 변화 없이 지속성의 차원으로 소화되더라도 그게 바로 시와 같은 순수 회화의 추상적 매력 아니겠냐는 반문을 미리 던져 본다. 언어 영역에서의 레토릭이 한때 합목적성에 골몰하고 경쟁 우위 헤게모니에 대한 상호 도전의 역사를 지났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적 실천으로서 유연성이 목격되기도 했듯이, 실제 언어 습관처럼 직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정직성의 작업들이 한편으로는 그저 평화롭거나 몽환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그러하듯, 이미지란 본래 그런 것 아닐까. 글/배민영(예술평론가) * 사진촬영 : 이름 E.reum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