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리킴, Episode 1-1Oil, Acrylic and Mixed Media on Canvas162 x 97cm, 2022● 전지적 작가 시점배민영(예술평론가)1. 웅덩이로부터이브 본푸아Yves Bonnefoy의 시집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Du Mouvement et de L’immobilite de Douve>을 옮긴 이건수는 작품의 중심 대상인 ‘douve’에 대해 “웅덩이 속에 한동안 검게 고여 있거나 폐허의 영지를 관통하며 조용히 흐르는 강의 흘러가는 흐름을 파악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언급하며 “현실이란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험난한 연속 운동이기에, 매 순각 죽고 사는 두브의 존재는 불사를 꿈꾸는 욕망의 무모함과 인간 운명의 필멸성을 더불어 의미한다.”며 ‘부동 속 운동’의 의미를 환기한다. 몰리킴 작가가 즐겨읽는다는 이 시집의 시들은 영감의 면에서는 비슷하나 현상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본푸아의 웅덩이는 결국 흘러간다는 점이 방점이라면, 몰리킴의 웅덩이는 그것의 근원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몰리킴 작가가 쓴 다음의 노트는, 말하고자 하는 시간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자. 들여다보자. 저 깊은 심연을.무엇이 보이는지?무엇이 들리는지?오랜 외면 끝에 이제는 마주보는 시간.오래전 낯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몰리킴, Episode 1-2Oil and Acrylic on Canvas, 91 x 72cm, 2022 ▲ 몰리킴, Episode 1-3Oil & Acrylic on Linen, 35 x 25cm, 2022 ▲ 몰리킴, Episode 2-1Oil on Canvas, 53 x 45cm, 2022▲ 몰리킴, Episode 2-4Oil & Acrylic on Canvas, 41 x 32cm, 2022 ▲ 몰리킴, Episode 2-5Oil & Acrylic on Canvas, 73 x 61cm, 20222. 투명한 심연몰리킴의 심연은 니체의 그것처럼 무겁지 않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보다 도식적이지 않다. 그렇다. 유화를 수채화처럼 다루는 특유의 깊이와 질감. 세상의 많은 물이 제각각 다른 투명도를 가졌기에, 자칫 몽환적이니 표현주의니 하는 느낌과 장르의 형용사와 명사로 규정하기보다는 발색과 농도로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끄집어낸 단어의 끝엔 ‘투명함’이 있었다. 투명함은 내적으로는 과감한 동기를 표출하며, 외적으로는 생명의 주제를 자극한다. 앞에서 언급한 본푸아의 시 일부를 가져와 본다.움직이지 않는 얼굴의 흐릿한 몽롱 속에서그대의 반영과 열기와 피를 거울 안에서처럼잃어버린 체하는 것인가 아니면그대는 진정 죽은 여인인가?이 부분이 몰리킴의 관점과 유사한 이유는 작업 전반에 흐르는 가사(假死)의 상태와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이는 잠이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 활동이라는 점과, 시간을 새롭게 편집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에서 세잔의 정물을 논평하며 “외적으로 죽은 사물이 내적으로 지니게 된 생명”이라고 한 언급을 차용한다면, 몰리킴의 작업은 “외적으로 죽은 시간이 내적으로 지니게 된 생명”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작가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억지를 부리지도, 추억의 환상이 무조건 긍정적인 것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과 낯섦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오늘도 정신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몰리킴, Episode 3-1Acrylic, Oil, Oil Pastel, Color Pencil & Mixed Media on Canvas65 x 53cm, 2022 ▲ 몰리킴, Episode 3-3Acrylic, Oil, Oil Pastel, Color Pencil & Mixed Media on Canvas65 x 53cm, 2022 ▲ 몰리킴, Episode 4-2Oil Pastel on Canvas, 33.4 x 24cm, 2022 ▲ 몰리킴, Episode 8-6Acrylic, Charcoal, Conte, Pastel & Oil Pastel on Canvas73 x 73cm, 20223. 분절된 이야기시간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분절되어 있다. 이야기의 속성도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으며, 각 개인에게 주어진 삶은 더욱 그렇다. 분절로부터 태어나 자유로움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기억과 상상의 역할이 특별한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몰리킴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큰 틀로 이끌어 가며, 때로는 외연적 대상인 소년의 이야기를 또 때로는 내면적 세계인 소녀의 이야기를 앞세운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후자에 속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시를 거듭하며 풍부해진 이야기의 폭과 이번 전시를 작품 제목에 정보를 최소화하여 네 개의 에피소드로 나눠 진행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 자유로움이 더욱 확보되었고, 이렇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스타일은 전지적인 시점을 취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기실 문학 등 예술 작품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을 만나다 보면, 그 관점이 많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친절하게 느껴지거나 우리가 그 지위에 서 있다는 여유로움을 공유해서라기보다는, 여전히 창작자가 아닌 관찰자 시점에 머물러 있다는 태생적 한계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여지를 인식한다는 점에 매료되곤 한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가 <일상적인 삶La Vie Quotidienne>에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적어두었듯 몰리킴의 숲 속에 소환된 여러분이 현실과 상상의 중간쯤인 상징들을 마주하는 이 시간은 그 공백의 분절성과 모호함을 끌어안고 손을 내민다. 절대자가 내미는 구원의 손길과는 다른, 침전하던 자아의 위로 받은 영혼이 말하는 인간적이고 연약한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