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닮음을 위해 | 유미주(비평가)
윤주원의 개인전 《잎의 결 GYEOL - Leaves•Time•Memory》에서 대부분의 회화 작업은 조경식물의 잎 형상을 판화로 평면화하며 시작한다. 원형 캔버스 위에 잎사귀 이미지를 여러 번 찍어내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종이에 그려진 잎 레이어가 튀어나온 채로 덧붙는다. <여섯잎의 순환> 시리즈에서 이 반복은 점점 캔버스 바깥으로, 입체를 향해 튀어나가고자 한다.
기하학의 타일덮기나 프랙탈은 원형과 완전히 같거나 닮음비를 유지한 채 형성되지만, 생태계에는 그러한 완전무결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종(種)이 완전히 같은 유전자 패턴을 지니면 그 패턴을 공략하는 외부 세력 앞에 절멸하고 만다. 그래서 모든 종은 유사한 패턴을 공유하되 개체별로 사소한 차이를 둔다. 윤주원의 회화는 이 본능을 드러낸다. 판화 레이어가 더해질 때마다 기존 형태와 닮았지만 조금씩 다른 이미지가 증식하며 쌓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증식의 바탕이 되는 평면 자체가 이미 순환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윤주원이 사용하는 종이의 상당수는 이전 작업에서 남은, 버려질 뻔했던 잔여물을 거두어들인 재생종이다. 소진되고 남은 흔적이 폐기되지 않고 다음 작업의 바탕이 되어 새 잎사귀를 받아 안는 이 과정은, 화면 위의 '닮음의 증식'을 재료의 층위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재료 자체가 순환하고 기억하며 시간을 겹겹이 쌓아나가는 셈이다.
혹자는 판화가 '닮음'이 아닌 '같음'을 재현하는 매체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동일한 이미지를 복제하는 판화 기술은 없다. 찍을 때마다 잉크의 양과 종이의 흡수력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때로는 <여섯잎의 순환 : 번짐>처럼 얼룩지기도 한다. 즉 판화는 '같음'을 복제하는 매체가 아니라 '닮음'을 증식시키는 매체다. 이십 년 넘게 판화를 해온 윤주원 자신이 이 차이를 가장 민감하게 알 것이다. 그래서 윤주원은 잎사귀를 그린다. 단순한 패턴처럼 보여도 모두가 조금씩 다른 '잎'이라는 점에서, 생명은 판화의 '닮음'과 '다름'을 동시에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능이 증식일 때, 한 자리를 차지한 개체가 있으면 다른 개체는 다른 곳에서 피어야 한다. 그래서 윤주원의 회화에서 작은 잎새들은 평면을 빠져나와 3차원의 세계로 향한다. 이 잎사귀들은 <순환> 시리즈로 벽면을 채우고 <잎의 숨결> 시리즈로 공간을 채우며 <하나의 잎, 무한한 변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전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도자 작업으로 나아간다. <새겨진 시간> 시리즈에서 윤주원은 잎사귀를 찍어 구워낸다. 종이보다 단단한 매체가 더 오랜 시간을 점유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도자 작업에 작은 클로버 무늬가 잎사귀 무늬와 함께 찍혀 나온다는 것이다. 이 클로버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어머니와 함께 한강을 걸으며 네잎클로버를 찾아 헤매던 시간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잎 위에 새겨진 클로버는 마치 아버지가 건네는 인사처럼 읽힌다. 생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잎과 나누는 작별인사이면서, 동시에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다.
전시의 제목이 드러내는 결은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이 전시를 마주하는 일은 나뭇잎 위에 찍힌 클로버 무늬 같은 결, 나이테처럼 시간을 쌓아 만들어진 결, 이 작은 결들을 섬세히 읽어나가는 일이다. 이는 잎사귀 하나하나의 미세한 차이를 읽어내는 일인 동시에, 재생종이처럼 되풀이되어 몸을 바꾸는 재료의 결과, 판화에서 도자로 옮겨가며 쌓인 시간의 결, 그리고 그 위에 조용히 얹힌 네잎클로버 같은 기억의 결을 풀어 헤치며 읽어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잎의 결 | 윤주원 작가노트
내게 잎은 자연의 축소판이다. 같은 종의 잎이라도 같은 잎은 하나도 없다. 잎맥이 뻗어가는 모습도, 벌레가 남긴 흔적도, 계절을 지나며 변해가는 색도 모두 다르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잎 안에는 질서와 순환,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래전 자연의 문양과 반복에 끌렸던 관심은 결국 잎으로 이어졌다. 처음 잎에 마음이 간 것은 그 모습에서 내 삶의 한 부분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잎을 오래 바라보고 작업할수록 그 안에서 나의 삶뿐 아니라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하나의 잎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같은 형태도 겹치고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구조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는 자연스럽게 공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작업의 바탕에는 오랫동안 몸에 밴 판화적 사고가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어떤 재료와 기법이 적합한지, 어떤 순서로 진행할지, 평면에서 공간으로 어떻게 확장할지를 머릿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한다. 판화의 복수성 역시 같은 이미지를 에디션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구조로 확장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한 장의 판화는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단위가 되고, 반복된 이미지는 겹치고 연결되며 입체와 설치, 모빌로 이어졌다.
내 작업은 시간을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투명한 레이어를 한 겹씩 쌓고, 실크스크린의 한 도를 찍은 뒤 다음 도를 올리고, 회화에서는 재료와 색을 쌓은 뒤 다시 조각도로 파낸다. 각각의 과정에는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겹쳐 하나의 화면이 된다. 이전에는 색의 조합과 배열에서 생기는 시각적인 효과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색의 역할을 줄이고 잎의 구조와 형태, 선에 더 집중했다. 색을 덜어내자 잎의 구조와 조각도로 파낸 선, 화면에 쌓인 재료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판화 작업 후 남은 종이는 버리지 않고 다시 풀어 재생종이로 만든다. 한 번의 쓰임을 다한 종이는 새로운 작품의 재료가 되고, 이전의 흔적을 품은 채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내게 순환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품은 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나는 잎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실크스크린으로 잎을 찍고 오려 쌓아가는 작업을 오래 해오면서, 어느 순간 잎이 살아온 모습을 온전히 기록하고 싶어졌다. 땅에 떨어지거나 가지치기로 생을 마친 잎을 흙 위에 압착해 잎맥과 표면의 흔적을 남겼다. 잎 자체가 하나의 판이 되어 그 모습이 흙으로 전사되는 과정은 내가 오랫동안 해온 판화의 행위와도 닮아있다. 잎은 흙에서 나고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잎이 지나온 시간과 흙이 도자가 되어가는 시간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어머니와 한강을 걸으며 수없이 많은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그때 우리에게 네잎클로버는 행운이 아니라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견뎌 낸 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을 다한 잎 위에 네잎클로버를 새긴다. 제 시간을 다 살아낸 잎에게 “수고했다, 잘 살아냈다”고 건네는 작은 인사이자,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잎의 결(GYEOL)」에서 ‘결’은 잎맥만을 뜻하지 않는다. 화면 위에 켜켜이 쌓인 층, 조각도로 파낸 자국, 흙에 새겨진 잎맥처럼 서로 다른 재료와 방식에는 모두 지나온 시간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재료 위에 쌓이고 새겨진 시간이 내가 말하는 ‘결’이다.
잎을 오래 바라보고 작업하면서 사람 역시 살아온 시간과 겪어온 일, 기억이 쌓여 저마다의 결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잎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연의 형태만이 아니라 그 안에 비친 사람의 삶이다. 내 작업이 그 삶에 건네는 작은 존중과 인사가 되고,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윤 주 원 YOON, JUWON
2001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화과 판화전공 석사 졸업
199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사 졸업
개인전
2026 <잎의 결 GYEOL-Leaves·Time·Memory>스페이스엄, 서울
2025 <다시, 봄 One Leaf at a Time> 갤러리 틈, 서울
2024 <이파리의 왈츠> 갤러리 컬러비트, 서울
2022 <PLant + Antler> 디멘션 갤러리, 서울
2022 <PLAntler> CICA 미술관, 경기
2021 <BRANCH OUT> 스페이스엄, 서울
2018 <Colorful Wonders of Nature> 산지갤러리, 서울
2017 <Colorful Wonders of Nature> 갤러리 카페 델라비타, 인천
2016 <오색찬란> 에이바이봄, 서울
2016 <오색찬란> 갤러리 토스트, 서울
2013 <WINGS> 아트스페이스 루, 서울
2001 <GAZE> 갤러리 창, 서울
주요 그룹전
2026 <삼삼오오> 스페이스엄, 서울
<NEW ROUND> 갤러리 박영, 경기
2025 <무관한 것들 UNRELATED THINGS> 권순왕X윤주원 아트로직스페이스, 서울
<시담示談::화해를 위해 먼저 건네는 말> 사랑아트갤러리, 서울
그 외 다수
시간의켜-사이 Layers of Time-In Between - 윤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