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문 개인전 새가 말거는 시간 | 김노암(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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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새들도 집 근처 개나리 성긴 가지가지 사이와 처마 끝, 굴뚝으로 들어간다, 옆 가까이 가도 꼼짝하지 않고 나를 멀끔멀끔 바라본다. 마치 어둠으로부터 조용히 나와 나의 집을 지켜주는 파수꾼 같다. 모두에게 안녕을 기원하고 저녁 인사를 나눈다. 이제 밤이 별보다 높다. 앞산 어둠이 깊을수록 수줍은 소쩍새 울음소리가 청량하게 산을 울린다. 생각해보니 오늘 제일 많이 만나고 대화한 상대가 새들이었고 아마 내일도 그럴 것 같다. 별일 없는 내게 그들이 옆에 있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_작가노트
새가 날아와 앉아 있는데, 꼭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새를 보면 새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다른 곳을 보면 새는 다시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새는 내게 뭔가 말을 거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눈을 맞추면 계속 딴청을 부렸다.
‘새야, 내게 말하려는 게 있으면 말하려무나.’
그러나 한참을 앉아있던 새는 갑자기 후두둑 날아가버렸다. 깃털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그 깃털이 나와 새가 분명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강석문 작가의 즐거운 그림은 그런 맥락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자유분방하게 생긴 새들이 그의 그림의 주인공이다. 새는 희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쁜 새가 아니라 엉뚱하게 생긴 새들이다. 부리는 너무 크고 또 부리가 크니 머리도 크다. 몸뚱이는 상대적으로 작고 비뚤하고 구부정해서 좌우비례가 맞지 않는다. 눈은 작고 까만 단추 하나가 달려 있는 것처럼 단출하다. 심오한 눈빛은 아니지만 뭔가 탈속적인 인상이다. 날개는 있으나 가장 높이 나는 새가 되려했던 조나단 리빙스턴과는 달리 별로 날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새들은 언제까지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몸을 살짝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호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새는 공룡과 같은 생물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새는 태어날 때부터 수억만 년의 지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사를 온몸으로 경험해온 것이다. 공룡은 인간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새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인간들과 함께 지상을 활보했고 공중을 날아올랐다. 지상과 공중의 천적으로부터 살아남고자 새들은 대지와 하늘의 중간지대에 둥지를 만들고 꼭 필요할 때만 날개를 펼치는 지혜를 키워왔다. 어슴프레한 새벽, 한낮의 태양과 나무의 그늘 사이에서 민첩과 지혜를 그리고 생명의 자유를 조용히 퍼덕거렸다.
강석문의 새들은 땅과 하늘 중간에, 그리고 아주 낮은 하늘, 그러니까 땅에 가장 가까운 하늘에 뚱한 표정을 한 채 앉아있었다. 새들은 서구문화권에서 흥기한 현대미술을 가만히 살펴보고 가늠하고 있는 인상이다. 그들은 솟대 위의 새처럼 이곳과 저곳, 이승과 저승, 낮은 차원과 높은 차원을 매개하는 존재다.
작가의 그림 속 등장 동물들은 동화적 또는 우화적 세계의 존재들이다. 동양판 이상한 나라의 엉뚱한 동물들이다. 그들은 노자와 장자의 친구들처럼 뭔가 세상살이의 현명한 도를 깨우친 존재들처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2
“기다려도 기다려도 / 벗들은 오지 않고 / 중을 찾아보아도 / 중들도 간데없네. / 오직 수풀 속 / 산새들만 / 지종지종 친절하게 지저귀누나.”-이인로, <천수사 벽에 쓴다 題天水寺壁>
물질주의와 세속적 속물성이 세계의 안과 밖에 팽배해지면서 동화를 읽고 동요를 부르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세계의 빛보다 그늘이 짙고 길어지는 세계화가 가속화되던 밀레니엄 직후 고독사한 박이소의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문구는 마침내 우리 일상의 비관적 희망 없음을 의미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사람과 자연과 일상생활의 기쁨과 의미를 충실하게 채워 넣어야 한다.
동요를 부르던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인 것 같다. 창작동요제가 사라진지도 몇십 년이 흘렀다. 꾸밈없이 천진한 세대의 상상력은 점차 도시를 떠나 숲으로 들어갔다. 소박하고 정감어린 순수한 리듬과 가락의 이미지는 여전히 우리 안 중심에 휘몰아치고 있다.
전통적인 조선화 또는 민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새 그림을 이어받으며 작가의 지저귀는 새들은 나뭇가지들 사이에 생기발랄하다. 새들의 노랫소리에 휩싸여 밥때를 놓친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린 듯 그림 밖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삐죽빼죽 가지가 뒤엉킨 나무들, 그 사이사이에 앉거나 날거나 내려보거나 올려보거나 지저귀거나 침묵하거나 서로를 바라보거나 등을 돌리거나 그렇게 대자연의 생령들이 화면에 가득하다. 자연과 생명의 파노라마 사이로 사람도 대자연의 일부가 되고 세속의 이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작가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대화하는 새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관심하게 생태의 균형을 맞추며 공존하는 것이다. 작가는 새들에게 말을 걸고 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새들은 특유의 뚱한 표정과 함께 마치 조각보를 얼기설기 이어붙인 듯 날개와 몸뚱이와 꼬리와 나무와 풀과 꽃이 그리고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새들은 작가의 꿈속에도 날아와 앉는다. 작가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시간을 살게 된다.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든 시간이 새들의 날갯짓으로 연결되어 버린다.
강석문의 회화는 새와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 존재성과 생의 기쁨으로 가득 찬 풍경 연작이다. 무거운 주제나 메시지를 담은 엄숙하고 권위적인 형이상학적 이념이나 질서에서 벗어나 소박한 소재와 구성, 소소한 사물과 사건과 관계의 기쁨의 미시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강석문의 이미지는 기술적 요소를 최대한 절제하고 난 후에, 심지어 기술 이전의 단계에서 형성된 조형요소와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인간의 본질,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 그리고 자연의 본성을 겸손하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생활상을 반영한다.
작가의 이미지는 이중섭과 샤갈, 장욱진과 이왈종의 정서와 닿아 있다. 황창배와 황주리의 풍자와 유머가 있다. 현대미술의 혁신적이며 실험적인 최전선의 투사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과 어울리는 삶, 순수한 사랑의 세계, 명상적 심미의 세계로 이어진다. 말과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겁고 싱싱한 자연의 순간, 가족애와 인류애의 빛이 빚어지고 있다.
달과 파랑 - 강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