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지나고까지 To the Autumn Equinox and Beyond
만추, 우수, 추분. 얼마 전부터 절기를 지칭하는 두 글자의 함축적인 한자어에 매료되어 이를 따라 그림의 제목을 붙이기 시작했다. 곡우, 입추, 소설 등 여전히 설레는 이름들은 앞으로의 작품들을 위해 아껴두고 있다. 전시의 제목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춘분 지나고까지>에서 따온 것이다. 소설가가 말 그대로 춘분 지나고까지 쓴 글들이라 붙인 이름이라는데 이 전시 역시 추분을 막 지나 시작하는 점을 고려했다. 우수雨水로 시작한 신작 아홉 점 역시 추분秋分으로 끝났다.
지난 긴 겨울을 소세키의 소설 전집을 읽으며 버텼다. 짧은 기억력 탓인지 얼핏 비슷한 주인공들과 삼각관계의 서사들은 희미하게 뒤섞여버렸다. 대신 어느 책이든 적지 않게 할애한 섬세하고 정제된 계절의 묘사는 깊은 여운으로 남았다. 우리의 문인산수화도 그러하지만 하이쿠와 우키요에, 소세키의 소설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유독 일본고전문화에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계절의 정취와 쓸쓸한 모습은 언제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덧없고 쓸쓸한 비애를 일본적 미학이론으로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라고 한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 복잡한 미학용어는 사물이나 상황(특히 계절의 변화와 인생의 상황들)에 접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느낌, 적막감과 슬픔을 말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용어는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이고 신작들이 모두 그의 구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언제나와 같이 가을은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처럼, 언젠가 내공이 된다면 겨울은 추사의 세한도처럼 그리고 싶다. 그밖에도 캄캄한 빈 캔버스 앞에서 등대가 되어준 많은 옛 이름들이 있다. 다만, 과거 집과 도시의 쇠락한 모습을 그린 작업들에서 꾸준히 표현했던 모순된 감정을 나중에 운하임리히unheimlich, uncanny라는 단어에서 발견했듯 모노노아와레 역시 그동안 좇아왔던 비애의 감정을 잘 설명해준다. 감탄과 경외, 인간과 자연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일어나는 순화된 숭고한 감정, 순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깊고 애절한 이해 등등 이 용어의 설명을 들여다볼수록 그것은 서양의 미학개념인 숭고나 운하임리히와 닮았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절절한 감정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작업의 동기가 되겠다. 특별히 이 시절을 지나는 누구나 한산한 거리와 예전 같지 않은 풍경을 보며 한번쯤은 그 적막과 슬픔에 공감할 것이다.
겨울부터 해당 계절을 따라 그렸는데 봄을 다 그리기도 전에 여름이 왔다. 한 계절은 그것을 제대로 통과해보기도 전에 덧없이 끝나지만 언제나 겨울 다음에 봄이 올 거라는 당연한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영원한 풍경은 없다는 것을 절감한 후 이조차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김잔디
겨울수국 I - 김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