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視點으로 재창조한 혀현숙 작가의 행복기원
글 : 엄윤선 (스페이스 엄 대표)
50호로 배접한 이합장지 네 폭에 재현한 80년대의 상계동. 지금은 우후죽순으로 아파트가 난립해 있지만 작품 속 동네에는 아파트 대신 기와나 슬라브 지붕의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이 가득하다. 작가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상계동의 재개발 직전의 모습이다.
어린 허현숙은 맞벌이 부모님이 일하시는 동안 할머니의 귀여움과 보살핌을 받았다. 친구들과 골목을 뛰어놀며 구멍가게에서 불량식품도 사먹고 가끔은 옆집에 스스럼없이 들어가 밥상 앞에 앉아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어느 날 도시계획으로 인해 옛 동네가 허물어지고 새로 아파트를 짓게 되면서 이웃 친구들이 하나 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자신을 예뻐했던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들이 그립지만 사진 한장 찍어둔 게 없어서 옛 기억을 소환해 사진대신 그림으로 남겼다.
빼곡하게 화면을 채운 집들의 디테일이 새삼 도시의 과거모습을 상기시킨다. 바람에 기와가 날아가는 걸방지하는 타이어, 물탱크, 집집마다 옥상이나 마당 일각에 놓여있던 커다란 고무대야(라고 쓰고 ‘고무 다라이’라고 읽는!) , TV 안테나, 창밖으로 나온 난로의 연통까지, 박물관의 기록사진에나 있을 법한 사물들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다시점(多視點)을 통해 묘사한 집들이 비정형으로 일그러져 있어도 낯설지 않은 것은 이런 정겨운 사물 덕분이다.
多視點적 표현은 이 작업이 단순한 어반스케치를 넘어, 작가의 관념을 예술적 태도로 승화했음을 증명한다. 화면을 살펴보면 집들의 방향이 모두 제각각이다. 입체를 평면으로 펼쳐 여러 면을 동시에 보여주어 이집 저집이 서로 엉켜 있거나 심지어 겹쳐 있기도 하다. 건물들이 어찌나 빽빽한지 길이란 건 애당초 이 동네에 존재하지 않은 듯, 보이지도 그려넣을 공간도 없다. 현대 도시 계획하에 건설된 신도시가 반듯하게 정돈된 구역과 도로를 보여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흑연으로 작업했으니 지우개로 적절히 에러를 지워가며 완성했겠지.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민한 한지는 조금의 마찰에도 보풀이 일어나느라 수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모든 집들의 형태와 위치를 철저하게 계산하고 기획해 일말의 실수도 없이 조형의 완성도를 극대화했다.
뿐만 아니다. 이렇게 고밀도로 구축된 비현실적,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기억의 왜곡이 아닌 작가가 의도한 이웃과 이웃,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형상화한다. 동일한 디자인으로 건축됐을 법한 집 마저도 多視點을 통해 외관을 변형시키고 각기 다른 디테일을 첨가함으로써 화면 속 수많은 집들은 어느 것도 중복되는 것이없다. 그렇다. 그 집들 하나하나가 옆집 철수, 소꿉장난을 함께 하던 영희 순이, 친절한 문방구 아줌마였다. 무미건조한 건물이 아닌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서, 사람마다 가정마다 모두 다른 삶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에 집들도 각각 다른 이야기와 기억을 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철거와 함께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 하는 순간을 맞으며 걱정과 근심, 아쉬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허현숙 작가는 그들을 기억하며 행복하라고 축복을 전한다. ‘행복’이란 단어가 문득 상기시킨 노래 <Don’t Worry, Be Happy> 에 이런 구절이 있다.
In every life we have some trouble / When you worry you make it double / Don't worry be happy
모든 삶엔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걱정할수록 근심은 두배로 커지니걱정일랑 마시고 행복하세요.
Ain't got no place to lay your head / Somebody came and took your bed / Don't worry, be happy
머리 둘 곳도 없어지고, 누군가 당신의 잠자리를 빼앗아가도 걱정하시마시고 행복하세요. (가수 : Bobby McFerrin)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수가 작가의 마음을 어쩜 이리도 잘 헤아렸는지. 장난스런 휘파람과 멜로디가, 부서지는 삶의 터전과 사라지는 집의 온기를 함께 경험한 상계동 이웃들에게 너무 경박한 게 아닌가 싶다가도, 마음 심란한 그들을 연필로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묘사한 작가의 유머와 가수의 낙천성은 동일 선상에 있는듯 하다. “흑연 선들의 반복되는 행위로 만들어진 도시의 모습은, 흡사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듯 반복행위를 통하여 나의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라는 작가의 생각도 이 곡의 리듬과 멜로디가 도돌이표로 무한 재생이 가능한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런데 만약 이 작품명을 노래의 타이틀처럼 “행복하세요 Be Happy”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세요’ 라는 명령어가 ‘~하길’ 이라는 권유의 어미보다 적극적으로 들린다. 잘 살라는 부탁이면서 따뜻한 명령이니까. 이따금 말이라는 게, 특히 욕망과 기원을 동시에 담아야 할 때 충분한 그릇이 못되는 경우가 있다.
허현숙의 '어디서든 행복하길 바랄게요' 를 대하는 마음이 그렇다. 이게 마냥 뜨뜻미지근한 응원이 아니거늘. 그 안에 불구덩이 같은 눈물과 함박웃음이 한식구처럼 다같이 있거늘. 3미터가 넘는 큰 화폭, 촘촘하고 세밀한 구성은 기억의 얽히고 섥힘, 향수에 대한 무게와 깊이일 것이다. 한번의 삐끗함도 허용하지 않는 한지 위에서 나타난 집중력과 진지함은, 풍등을 하늘에 띄워 소원을 전달하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겠지. 그 모든 애틋함과 축원을 허현숙의 예술언어로 재창조하면서 이 작품은 한 개인의 서사 그 이상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모두의 기록으로 공유하게 되었다.